과학

정우현 - 2022 생명을 묻다

이니샬라 2023. 9. 17. 09:51

많은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은 단 한 번의 우연적인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리라 믿는다. 거의 일어나기 어려운 말도 안 되는 확률이지만 단 한 번이면 충분하며, 그것으로 현재의 모든 다양성들을 설명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화의 원리는 그런 믿음과 다르다. 이미 있는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이가 일어나는 일이건, 무기물의 혼합물이 어떤 극적인 반응으로 유기물로 바뀌는 일이건, 또는 그 유기물들이 한데 뭉쳐 기적처럼 꿈틀거리는 최초의 생명체를 빚어내는 일이건, 모두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진화는 무한한 경쟁이며, 약자를 따로 배려하지 않는 비정한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자연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진화의 기회는 반드시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변이 개체와 잉여의 생산력이 제공될 때만 생겨날 수 있다.
20세기 초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 Thomas Mann(1875~1955)은 『마의 산 Der Zauberberg』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입을 빌려 토로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되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모든 생명현상은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앞선 생명현상 없이는 탄생될 수 없다. 그럼에도 생명 자체는 원인이 없다. 만약 이 현상에 대해 설명 해야 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다. 어떤 물질이 있었는데, 이 물질은 무생물인데도 고도로 발달했다. (…) 그런데 이 물질은 일반적으로 '죽어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죽음은 생의 논리적 부정에 지나지 않지만, 생명과 생명이 없는 것 사이에는 과학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 심연을 여러 이론으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심연은 그 이론들을 모조리 삼켜버려, 깊이와 넓이를 조금도 줄이려 하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회의적인 관점으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덧없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지구에 태어나 생존하고 있는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대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기술적 진보에 취해 쏟아지고 있는 요즘의 대중과학서들은 대부분 우리의 존재가 우연의 결과임을 과학적 결론이자 기정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속단은 오히려 더 과학적이지 못해 보인다. 합리적인 사고와 모든 것을 의심할 줄 아는 비판적 자세는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뉴턴의 고백처럼 우리는 아직 미지의 진리가 가득한 바다의 한 귀퉁이에서 매끄러운 조약돌과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으며 뛰노는 어린아이와 같다.
pp. 129-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