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세종시대의 밝은 면을 주로 부각시켜 소개했으나 세종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무엇보다 사랑했던 가족 셋을 재위 26~28년 사이에 차례로 잃었기 때문이다. 재위 26년 12월에 총애하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을 20세로 잃었고, 한 달 뒤인 재위 27년 1월에 애지중지하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천연두를 앓다가 19세로 요절했다. 다음 해인 재위 28년 3월에는 금슬이 좋았던 왕비 소헌왕후여憲王局 심씨가 또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이미 임금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궁궐을 떠나 대군의 집이나 별궁을 전전하면서 거처하고 있었으나, 세 가족을 연이어 잃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손을 떠는 수전증까지 생겨 명나라에 보내는 외 교문서에 수결手決(싸인)도 하지 못할 만큼 심신이 탈진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을 떠나보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슬픔도 극에 달했다. 세종을 따뜻하게 감싸줄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그 슬픔의 틈을 뚫고 들어온 것이 불교였고, 이를 매개한 사람이 집현전 출신 학자 김수은金守溫과 그의 형이자 승려인 신미였다. 임금보다도 수양과 안평이 더욱 적극적으로 신미를 따르면서 불사佛事를 크게 벌이기 시작했다. 사 자死者의 명복을 빌고, 산 자의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였다. 복선화음과 인과응보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산 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수온과 수 양대군은 공자의 가르침이 부처의 가르침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면서 왕비를 위한 불당佛堂 건설을 임금에게 촉구했다.
그동안 사사전寺社田을 혁파하고 불교를 견제해 왔던 임금도 대군들의 주장을 따라 세종 30년에 왕비를 위한 불당을 경복궁 뒤 언덕에 건설했다. 지금 청와대 자리다. 모든 신하들이 궁궐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불당을 짓고 승려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들고 일어났다. 또 임금이 숭불을 하면 전국민이 따라서 불교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임금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풍수가들도 들고 일어나서 불당 자리가 세자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 흉지凶地라고 비판했다. 백악산(북악산)의 내맥來脈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절대로 사찰을 지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풍수가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세자가 임금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단명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 단종마저 비명에 죽었다. 지금 청와대의 풍수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이때부터 나온 것이다. 고종 때는 이 자리에 경무대景武臺를 짓고 무사들이 군사훈련하고 무과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이용했다가 일제시대에는 총독 관저를 지었다. 총독은 경복궁을 발아래로 굽어보면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pp. 22-23.
'인물 평전, 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헤세 - 201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0) | 2022.12.01 |
---|---|
앤드루 카네기 - 2007 성공한 CEO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1) | 2022.11.20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2017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0) | 2022.02.05 |
알버트 아인슈타인 - 2016 아인슈타인이 말합니다 (0) | 2022.02.05 |
윌리엄 헤르만 - 2013 아인슈타인에게 묻다 (0) | 202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