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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로즈 조지 - 2021 5리터의 피, 피에 얽힌 의학, 신화, 역사 그리고 돈

by 이니샬라 2023. 1. 17.

로즈 조지의 《5리터의 피》는 우리 몸속을 흐르는 피를 단순한 생리적 액체로만 보지 않는다. 저자는 피를 통해 인간 사회의 역사와 문화, 제도와 경제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차분하고도 날카롭게 풀어낸다. 피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지만, 그 의미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졌다. 이 책은 그 차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드러낸다.

 

인류 역사에서 피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해 왔다. 고대의 사혈이나 제의, 종교적 의례 속에서 피는 신성하거나 금기시되는 대상으로 다뤄졌고, 동시에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오래된 관습과 믿음은 때로는 잘못된 의학적 관행으로 이어졌고, 근대 의학이 발달한 뒤에도 사회적 편견과 결합해 제도화되기도 했다. 로즈 조지는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며 피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역사적 맥락과 함께 풀어낸다.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혈액과 인종을 연결한 차별의 역사다. 한때 미국에서는 혈액 주머니에 인종을 표시하고, 병원과 혈액은행에서 백인과 흑인의 피를 따로 보관하거나 특정 인종의 피를 다른 인종에게 수혈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혈액을 구분해 보관하고, ‘흰 피’와 ‘검은 피’를 분리하는 일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나 ‘정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전쟁부나 공공기관 차원에서도 인종별 혈액 혼합을 금지하는 지침이 내려졌고, 일부 국가에서는 인종적 이념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피가 단순한 생물학적 물질을 넘어 사회적 편견과 제도의 산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대의 과학 지식이 쌓이면서 혈액형과 감염병에 대한 이해는 크게 진전되었지만, 사회적 편견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는 과학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헌혈 시스템과 혈장 산업, 감염병 관리의 역사 속에는 과학적 근거와 제도적 실행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로즈 조지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 간극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헌혈을 둘러싼 경제적 거래, 특정 집단의 배제, 그리고 혈액을 둘러싼 공포와 낙인은 단순한 의료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피는 개인의 몸속에서 흐르지만, 그 의미는 공동체와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다. 개인의 경험과 통계, 역사적 기록을 교차시키며 저자는 피가 사람들의 삶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섬세하게 보여 준다. 누군가의 피가 다른 누군가에게 거부당했던 역사, 피를 둘러싼 불평등과 착취의 현실은 결국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해 왔는지를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