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에 붙인 표제들이 우리에게 되새겨 주듯이, 복음서 가운데 어느 것도 유일무이한 복음서(theGospel)가 아니다. 네 복음서 모두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증언이다. 그들의 신학 주제와 문제가 텍스트 너머에, 역사가가 이런 자료들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 너머에 존재한다. 소위 역사 속 예수 탐구가 지닌 가장 큰 위험은 역사가가 내린 결론들이 중요한 여러 규범들 중 단지 하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자 실체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평을 롱해 하나의 규범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마치 타티아노스가 여러 복음서가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방법처럼, 유일무이한 복음서를 새 율법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한 주를 중언하는 증인이 다양하다는 것(이 다양한 증인에는 신약 성서 다른 책들의 다른 기자들도 포함된다)은 이 주가 이 다양한 중인보다 위에 있는 이이자 이후에 등장한 기독교의 모든 신학적, 윤리적 주장과 결정 위에 있는 이임을 확실하게 일러 주는 한 방식이다. …
어쩌면 어떤 예수 초상을 규범으로 내걸면 오히려 만족스럽지 않은 신앙 이미지와 판단에 관한 신학적 비평이 촉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규범에 비춰 이런 신앙 이미지와 판단을 무턱 대고 재단하며 평가해 버리면 성령의 자유가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아울러 그런 규범적 초상은 기독교 복음을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공식화한 복음과 동일시할 수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어쩌면 마태는, 그리고 분명 후대에 복음서를 조화시키려 했던 이들도, 그런 일을 원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왜 그리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회는 늘 신앙 열정을 어떤 식으로든 통제해야 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복음서들이 저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여러 복음서를 정경에 넣은 것이 훨씬 큰 지혜였던 것 같다.
pp. 36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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