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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이성원 외 - 2025 방치된 믿음

by 이니샬라 2025. 12. 6.

 

무속인의 말은 때로는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어두운 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찾아간 사람에게 건네는 한마디가 등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반복되고, 요구가 쌓이고, 결국 주머니가 비어갈 때, 그 위로는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 책은 바로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모아 놓은 기록이다. 판결문이라는 차가운 문서들 속에서, 사람들의 믿음과 상처가 어떻게 금전적·정신적 피해로 바뀌었는지를 조용히 읽어낸다.

 

무속 범죄는 복잡해 보이지만, 많은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닮아 있다. 처음에는 작은 의뢰와 소액의 헌금으로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 의존은 깊어지고 요구는 커진다. 대출과 투자의 달콤한 약속, 기도와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걷어가는 돈들, 약속된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의 침묵.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유도당하고, 주변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가해자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권위적으로, 피해자는 그 권위에 기대어 더 많은 것을 내어준다.

 

숫자는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모습이다. 320건이라는 표본은 우연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날의 눈물이다. 평균 2억 6천만 원이라는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흔들어 놓은 무게다. 대출과 투자 사기가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믿음이 어떻게 돈의 유혹과 결합해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도와 의식이라는 신성한 이름이 횡령과 결탁할 때, 그 신성함은 쉽게 상업적 도구로 변질된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경고는 가스라이팅의 은밀함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현실 감각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은 곧 더 큰 의존으로 이어지고, 의존은 다시 금전적 요구를 정당화한다. 법정 기록은 그런 과정의 끝을 보여준다. 그러나 법정에 오르기까지의 시간, 그 사이에 쌓인 불안과 수치심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책은 판결문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복원하려 한다.

 

읽는 이에게 이 기록은 단순한 경고문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회복을 위한 안내서다. 자신의 경험을 통계와 비교해 보는 일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발 떨어져 서는 연습이다. 문자와 통화 기록, 영수증과 계좌 이체 내역, 녹취와 증언—이 모든 것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아픔과 회복의 조각들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법률 상담, 심리적 지지 역시 회복을 위한 발걸음이다. 피해를 인정하는 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용기다. 용기는 다시 삶을 세우는 재정비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믿음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와 희망을 원한다. 문제는 그 희망이 누구의 손에 맡겨지느냐에 있다. 믿음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려면, 그 믿음은 투명하고 상호 존중적이어야 한다. 권위는 책임을 동반해야 하고, 위로는 착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판결문 속 사건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키고 싶은가,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경계를 세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