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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윤덕한 - 2012 이완용 평전

by 이니샬라 2021. 10. 1.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정권의 무능과 부패, 탐욕이 자초한 재앙이었다. 민비가 권력을 장악한 지 9년 여 만에 국고는 완전히 거덜나 있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벌써 5년 이상 봉급 구경을 하지 못했으며, 구식 군대의 병졸들은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군졸들의 급료라고 해야 한 달에 쌀 6말 반에 불과했다. 이 정도가 되면 이건 이미 나라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고관들이야 봉급이 없어도 백성들을 등쳐 배를 불릴 수 있었지만, 힘없는 군졸들은 당장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군졸들의 불만이 심상치 않자 13개월 만에 겨우 한 달치 급료를 준다면서 나눠 준 것이 무게를 늘리기 위해 물을 부어 썩거나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이었다. 군졸들이 격분해 난을 일으킨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정부 관리와 군졸들에게는 봉급을 주지 못하면서도 민비는 자신이 낳은 세자, 뒤의 순종을 위해 나랏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이 낭비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7년 전 두 살 배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 이홍장(李馮章)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치고 청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아냈다. 민비의 미신 신봉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다. 그녀가 이처럼 미신에 빠진 것은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자 책봉을 받은 후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의 봉우리마다 돈 1천 냥과 쌀 한 섬, 베 한 필씩을 바치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궁중에는 무당과 복술 맹인 등의 잡인들을 끌어들여 굿판과 치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유명한 점쟁이 이유인(李浴寅)은 점 한번 잘 쳐주고 즉석에서 상으로 비단 1백 필과 돈 1만 냥을 받았다고 한다.5) 이러니 가뜩이나 빈약한 국고가 남아날 턱이 없었다.5) 진단학회/이선근, 『한국사』 (최근세편), 을유문화사, 1978, 465쪽. 군란의 와중에서 민씨 척족세도가들의 집은 대부분 불에 타고 민비는 난군을 피해 충주 장호원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척족의 중심 인물이던 민겸호(閔謙鎬)는 대궐로 몸을 피했다가 결국 군졸들의 칼날 아래 비명횡사하고 만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 겸 정부의 쌀을 관리하던 선혜청의 당상으로서 군란을 촉발시킨 직접 당사자였다.
pp. 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