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J. 헤셸은 예언자를 미래를 점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예언자의 언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안타까움을 전하는 고백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불의와 억압을 볼 때 하나님과 함께 분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지나치지 않는다.
헤셸은 범신론이나 신비주의를 경계했다. 신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과 마음을 나누는 인격적인 존재다. 지배자처럼 역사를 자기 뜻대로만 이끌어가지도 않는다. 그분의 마음은 계시가 이루어지는 특별한 순간에 드러나며, 예언자는 그때 뜻을 깨달아 세상에 전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힘을 과시하는 일방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마음을 주고받는 무대다.
이처럼 예언자에게는 두 가지 면모가 공존한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권위,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연민이다. 이들의 언어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권력의 그늘에 숨은 종교를 꾸짖고, 사회 깊숙이 파고든 불의를 직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침의 목적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다. 무너진 정의와 사랑을 바로잡고, 삶을 돌이켜 올바른 길로 나서라는 권고다.
예언자들이 목도한 세상 역시 신과 인간이 만드는 평온한 조화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등지는 인간의 오만, 그리고 그 앞에서 요동치는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예언의 메시지는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흔들어 놓는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역사 안에서 신의 존재가 늘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이나 부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헤셸은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를 읽는 시각을 교정한다. 모든 비극을 '신의 뜻'으로 단정하거나, 고통 앞에서 '신의 부재'를 외치는 극단을 모두 넘어선다. 신학도 추상적인 이론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아픔에 민감하게 응답해야 한다. 계시적 순간을 놓치지 않는 예언자적 안목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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